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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조센징들의 행태

일제시대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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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 쿠쿠릿토 · 뿌라모도 전 총리
"일본 덕분에 아시아 제국은 모두 독립했다. 일본이라는 엄마는 난산하고 모체를 해쳤지만, 태어난 아이는 무럭 무럭 성장하고있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나라가 미국이나 영국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할 수는 도대체 누구의 덕분인가. 그것은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룬 일본'이라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12 월 8 일, 우리에게 이 중대한 사상을 나타내 준 엄마가 몸을 걸고 중대 결의 한 날이다. 또한 8 월 15 일은 우리의 소중한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있는 날이다. 우리는 이 두 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 "
■ 말레이시아 
◎ 라자 · 다토 논틱쿠 전 상원 의원
"우리는 말레이 반도를 진격해 가는 일본군에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패해 도망가는 영국 군대를 볼 때, 지금까지 느낄 수 없는 흥분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은 일본의 식민지로 하지 않고, 미래의 각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위하여 각 민족의 국어를 보급시켜 청소년 교육을 실시해주었습니다. "
◎ 가자리 · 샤휘 전 외무 장관
"일본이 어떤 나쁜 짓을 한 거냐. 대동아 전쟁으로 말레이 반도를 남하했을 때의 일본군은 대단했다. 불과 3개월 만에 싱가포르를 함락시키고,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영국을 굴복시킨 것이다. 나는 아직 젊었지만, 그때는 신의 군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패했지만, 영국군은 다시 만회하지 못했고, 말레이시아는 독립을 이루었다. "
■ 인도네시아 
◎ 모하메드 나찌루 전 총리
'아시아의 희망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대동아 전쟁은 우리 아시아인의 전쟁을 일본이 대표해서 싸워준 것입니다. "
◎ 아람 샤 원래 셋째 부총리
"우리 인도네시아인은 네덜란드의 쇠사슬을 끊어 독립하기 위해 350년에 걸쳐 여러 차례 투쟁을 시도했지만 네델란드의 무력과 스파이망과 가혹한 법률에 의해 괴멸되어 버렸다. 하지만 일본군이 도래하자 순식간에 네덜란드의 쇠사슬을 끊어주었다. 인도네시아인이 일본에 환희하고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
◎ 산바스 원래復員軍人省장관
"특히 인도네시아 감사하는 것은 전쟁이 끝난 후 일본 군인 약 1,000 명이 귀국하지 않고, 인도네시아 국군과 함께 네덜란드와 싸우고 독립에 공헌 해 준 것이다. 일본 전사자는 국군 묘지에 모셔 공적을 기리고 수한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
■ 인도 
◎ 러그 크리슈 대통령
"인도는 당시 영국의 불심함 침몰 등이라고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우리와 같은 동양인 인 일본이 보기 좋게 격침시켰다. 놀라기도 했지만 이 쾌거에 의해 동양인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1969 년 니혼 게이 자이 신문)
◎ 하비뿌루 라만 전 인도 국민군 대령
"버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아시아 국가의 식민지 지배는 일소되어 차례 차례로 독립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양성한 자유에의 불길에 의한 것임 특히 기록해야 한다. "
◎ 구라바이 데 사이 인도 변호사
"인도의 독립 계기를 준 것은 일본이었다. 이것은 인도뿐만이 아니다.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민족 모두 공통이다. 인도 4억의 국민은 깊게 이것을 명기하고 있다. " 
(1946년 군사 재판에 출두 한 후지와라 씨들에게)
■ 스리랑카 
◎ l · R · 쟈야와루다나 대통령
"당시 아시아 민족은 일본을 수호자 또한 우방으로서 바라 보았다. ... 당시 아시아 공영 슬로건은 종속 민족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버마, 인도, 인도네시아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사랑하는 조국이 해방되는 것을 희망하고 일본에 협력 한 사람이된 것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 회의 연설)
■ 미얀마 
◎ 바 모 전 총리
"역사적으로 본다면 일본만큼 아시아를 백인 지배로부터 이탈시키는 데 공헌 한 나라는 없다. 또한 그 해방을 돕고, 또한 일본만큼 오해를 받고 있는 나라는 없다.
 
http://www.nipponkaigi.org/opinion/archives/844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환영 받은 일본 대표◆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29개국이 참여한 '아시아 - 아프리카 회의’가 열렸다. 
 
참여국은 모두 독립에 성공하였으며 인도의 네루 총리,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은래 총리,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중심이되어 개최한 최초의 유색인종에 의한 국제 회의였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겨우 주권을 회복해 카세 씨가 대표로 참여했다. 카세 씨는 1994년 7월 교토 외대 강연에서 1955년에 열렸던 당시 회의를 회상했다. 
 
"그 회의에 갔을 때 여기 저기에서 아프리카 대표, 아시아 대표가 나왔고, 
 
"잘 왔어요!" 
 
"일본 덕분이야! "라고 환영해줬다. 
 
국가 정상 중 한 명은 "일본이 대동아 선언을 내고 아시아 민족 해방을 목적으로 대동아 전쟁을 했다. 그 선언이 없었다면, 혹은 일본이 아시아를 위해 희생하여 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영국의 식민지 네덜란드의 식민지 프랑스의 식민지 상태였다. 일본이 큰 희생을 치르 고 아시아 민족을 위해 싸워줬기 때문에 오늘의 아시아가있다 "라고 하였다. 
 
그 때는 이제와서 보니 역시 '대동아 공동 선언'을 내서 좋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소홀히 하는 것이 바로 '대동아 전쟁'과 '대동아 공동 선언’이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해석 방법은 자기 비하에 빠져 있던 일본인과 달리 긍정적이었고 따뜻했다. 우리는 선인의 고심의 흔적을 잊지 않고 대동아 전쟁과 공동 선언에서 무엇이 일어 났는지 다시금 되돌아 명기하고 싶다.
 
https://ironna.jp/article/847

 

戦後70年 落ち着いて歴史を語れる国に

iRONNA編集部 今年は第2次世界大戦の終結から、日本にとっては大東亜戦争の終結から、70年の節目の年である。日本に厳しい視線を注ぐ国や勢力が、戦争をめぐる節目の日がくるたびに日

ironna.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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